2018년 창간호 [버스 타고 떠나는 답사 이야기] 북한산 비봉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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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조회 878회 작성일 18-09-04 18:47본문
why?
올해는 대구에서 버스가 달리기 시작한 지 107년, 서울에서는 90년이 되는 해이다. 가스등을 켜고 손님을 맞던 이 낯선 물건은 이제 우리 삶의 일부가 되었고, 전국 어디든 갈 수 있는 가장 싸고 편한 수단임에 틀림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스를 이용한 답사지 소개는 현격하게 부족한 것 같다. 버스가 지닌 위상에 비해 너무 박한 대우이다. 그래서 대중교통 이용자들이 접근할 수 있는 답사기를 쓰려고 한다. 누군가에겐가 도움이 되길 바라며. 우선 서울 광화문에서 출발하려고 한다. 전국 도로의 기준점인 도로원표가 있으니 출발점이 되기에 충분하지 않을까?
한때 높은 인기를 끌었던 <주몽>이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주몽(朱蒙)이라는 부여 왕자가 고난을 이겨내고, 고구려를 세웠다는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하다. 그런데 관점을 달리해보면 ‘소서노(召西奴)’ 이야기도 꽤나 재미있는 주제가 아닐까 한다. 남편을 잃고 새로운 사랑을 만나 국가를 건설했는데, 결국 배신당하고 자신의 아이들과 새로운 땅에 나라를 세운 여걸의 이야기. 주몽 이야기만큼이나 흥미로운 내용이다.
그런데 그녀가 어디에 나라를 세웠는지는 불분명하다. 『삼국사기』 등 기록에는 ‘소서노 모자가 남하했는데, 그녀가 죽자 비류(沸流)는 미추홀에, 온조(溫祚)는 하남 위례성에 각각 나라를 세웠다. 어느 날 비류가 와서는 온조의 나라가 번창함을 보고 분하여서 죽었고, 온조는 비류의 백성들을 합쳐서 백제(百濟)를 건설하였다’라고만 되어 있다. 다만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 의하면 그녀가 나라 세우고, 비류와 온조가 올라 나라를 정한 곳이 지금의 북한산 주변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서울 답사의 출발은 백제의 시작인 북한산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더구나 그곳에는 진흥왕의 염원도 세워져 있으니 첫 출발지로는 적격이다.
효자동에서 북한산까지 가는 길은 여러 경로가 있지만, 우선 비봉(碑峰)에 이르는 최단 코스를 골라보기로 했다. 광화문에서 보이는 산 너머의 산, 그곳에 이르기 위해서는 세종문화회관이나 경복궁역에서 버스를 타도 좋다. 다만 권하고 싶은 곳이 있다.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의 시비이다. 사직단 쪽으로 향하다가 경복궁 왼쪽 돌담길을 따라 15분가량 걸어가면 청와대가 나온다. 청와대 옆 무궁화동산에 들어서면 병자호란 시기 대표적인 주전파였던 김상헌의 집터를 알리는 표석과 시비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라는 시 한 구절을 가슴에 담고, 삼각산(三角山)-북한산-으로 향하는 것은 산행의 묘미가 될 것이다. 시비에서는 백악산에 가려 잘 보이지 않지만, 저 멀리 북한산을 찾아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다.
윤동주문학관
청와대 반대방향으로 빠져나와 ‘신교동’ 정류소에서 7212번이나 7022번, 1020번 버스를 타고 세 정거장을 가면 ‘자하문 고개/윤동주문학관’ 정류소에 이르게 된다. 언덕을 치고 올라가야하기 때문에 버스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버스를 타면 직진하다가 우회전해서 언덕을 올라간다. 그 우회전 때 왼쪽 창가로 보이는 청운초등학교는 조금 관심을 기울일 가치가 있다. 다름 아닌 정철(鄭澈. 1536~1593)의 집터이기 때문이다. 정철은 「관동별곡」, 「사미인곡」 등 우리나라 가사문학의 절정을 보여줬던 인물로 교과서에서 다루어진다. 그래서인지 청운초등학교 담장 아래는 그의 시비로 장식되어 있다.
다만 역사적 관점에서 그를 본다면 사뭇 다르다. 그는 정여립 모반사건(1589. 선조 22년)이라는 불분명한 사건을 기회로 동인에 대한 피바람(기축옥사)을 일으켰던 주인공이다. 단 한 번의 사건으로 4대 사화 전체를 합친 숫자보다 더 많은 이들을 죽이거나 권력에서 축출한 사람이니 정치적 태도와 문학적 자질은 다른 모양이다. 그리고 또 하나, 이곳은 김상헌의 친형 김상용(金尙容. 1561~1637)의 집터이기도 하다. 병자호란 때 강화도가 함락 당하자 폭사한 인물이다. 혹자는 담배를 태우다 그랬다고도 하지만 자결하였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해 보인다. 과연 안동 김씨의 집안 분위기라 할만하다.
청운초등학교에서 언덕으로 오르다 보면 ‘윤동주문학관’ 정류소를 알리는 안내 방송이 들린다. 안내 방송을 못 들었더라도 거대한 동상이 보인다면 그곳에서 내리면 된다. 이 동상은 1968년 1.21 사건 때 청와대 앞에서 김신조 부대를 막은 두 명의 경찰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계급의 차이 때문인지 경무관은 전신상으로, 경사는 흉상으로 서있다. 거기서 조금만 올라가면 창의문(彰義門)이 나온다. 조선시대 도성의 사소문 중 하나로 인왕산과 북악산 성곽을 이은 북소문(北小門, 자하문 紫霞門)이다. 남대문 동대문은 알아도, 북문(北門, 숙정문 肅靖門)과 북소문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자하문 터널이라는 이름으로 조금 알려져 있을 뿐이다. 사람들이 모르는 이유는 이 두 문이 잘 이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풍수상 지맥을 끊는 위치라서라거나, 음기가 강해서라는 이유이다. 달리 생각해보면 경복궁 윗자리인 백악산으로 백성들이 출입하는 것이 싫지 않았을까 싶다. ‘옳음을 분명하게 드러낸다’는 이곳 창의문은 ‘잘못을 되돌려 바르게 한다’는 반정군(反正軍)이 입성해서 광해군을 축출하고 인조를 세웠던 곳이기도 한데, 무엇이 의(義)이고 무엇이 정(正)인가 싶다.
버스에서 내려 도로 건너편을 보면 윤동주문학관이 바로 보인다. 폐 수도가압장과 물탱크를 이용하여 만들었는데, 정형화된 사각형이 아닌 독특한 구조로 되어 있어 한 눈에 띈다. 입구로 들어서면 전시실에서 그의 사진과 시집들, 고향의 우물 등을 볼 수 있다. 윤동주(尹東柱. 1917~1945) 한 사람을 담아내기 위해 들인 정성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꼭 추천하는 공간, 전시실 안쪽이다. 전시실에서 철문을 옆으로 열고 들어가면 콘크리트 공간이 나온다. 텅 빈 공간과 하늘, 무심한 듯 자라난 잡초가 시인이 마지막 머물렀던 후쿠오카 형무소의 삭막함을 애써 느끼게 해준다. 길을 따라 들어가면 콘크리트 방이 나오는데 시인 동주의 삶만큼이나 짧은 영상을 볼 수 있다. 별 하나에도 부끄러워했던 조선 젊은이의 고뇌가 담겨 있는 영상을 보고나면 방 안의 삭막함과 대비되는 뜨거운 무언가가 눈자위를 붉게 물들인다.
문학관을 나와 오른편 길을 조금 오르면 시인의 언덕이 나온다. 윤동주가 별 하나 하나의 그리움과 사랑을 심었을 것만 같은 공간이다. 이 언덕은 낮에 보아도 좋고, 밤에 올라와도 좋은 곳이다. 낮에 오게 된다면 고개를 왼편으로 돌려 북악산(北岳山 ≒ 백악산 白岳山)을 한 번쯤 바라보시라. 초록 숲 사이로 밝게 빛나는 흰 바위들, ‘과연 백악이다’ 할 것이다. 밤에 찾아와 서울 땅에서 빛나고 있는 별들을 감상하는 것도 좋은 일이다.
버스 차창너머로
시인의 언덕에서 내려와 ‘윤동주문학관’ 정류소에서 7212번 버스를 타고 비봉으로 향한다. 한두 정류소를 가다보면 ‘상명대 입구/석파랑’ 정류소를 알리는 안내 방송이 들리고 잠시 뒤 우회전한다. 우회전할 때 고개를 돌려 왼편을 보면 ‘석파랑(石坡廊)’이라는 이름의 한정식집이 보인다.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반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손재형(孫在馨. 1903~1981)이 사재를 털어 수집한 건물들을 모아 놓은 곳이다. 건축계의 전형필(全鎣弼. 1906~1962)이라 할 만하다. 지금은 고급 한정식집으로 바뀌어 상업화되기는 했지만, ‘석파정(石坡亭)’ 별채 등 옛 건물들을 가까이서 볼 수 있다.
우회전을 하자마자 오른편 차창 너머로 홍제천변의 세검정(洗劍亭)을 볼 수 있다. 명칭에 관해서는 ‘실록의 사초를 씻어냈다’는 설과 ‘인조반정 때 이른바 반정공신들이 칼을 씻었다’는 설이 팽팽하다. 그러나 이곳은 명칭보다는 풍광이 좋다. 비오는 소리에 그 경치를 보러 다산 정약용이 한 걸음에 달려왔을 정도로 비오는 전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지금의 건물은 1977년에 복원한 것이지만 옛 전경과 거의 흡사하니 조상들의 감상에 빠져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북한산에서
‘이북5도청’ 정류소에서 하차한 뒤 왼쪽 계곡을 따라 북한산을 오른다. 조금 오르다보면 ‘금선사(金仙寺) 목정굴(木精窟)’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보이는데 산행길이 멀다 싶어도 잠시 들러보길 권한다. 순조 임금으로 환생한 농산(聾山)이라는 승려의 전설 때문만이 아니라 자연 석굴의 풍미가 좋은 곳이다. 굴 안쪽 보살상 뒤에서 약수를 한 모금 하고, 바위 틈새에 만든 계단을 오르면 금선사 경내로 들어설 수 있다. 전형적인 사찰의 구조는 아니지만 아기자기하게 자리 잡은 전각들을 지켜보는 재미가 상당하다. 절 인심도 좋아서 점심 공양을 먹고 가라 잡기도 한다. 앞 건물의 지붕을 뒷 건물의 마당으로 쓸 정도로 작은 절이지만 꼭 들러야 할 곳이 있다. 바로 해우소(解憂所)이다. 이곳 경내와 일주문 바깥 등산로 화장실 중 한 곳은 꼭 들렀다 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산할 때까지 생리 현상을 감당할 곳이 없다.
금선사에서 비봉까지는 한 시간여의 산길이 이어진다. 길이라고는 하지만 딱히 정해진 길은 없다. 사람들이 남긴 발자국들을 따라 걷다보면 자연스레 길이 되는 것이다. 다른 경로에 비해서는 산행객이 적은 곳이라 경치를 감상할 여유도 부릴 수 있다. 한참을 치고 올라가다보면 어느덧 능선에 이르게 된다. 이곳에서 오른쪽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비석이 서 있는 봉우리를 만나게 된다. 비봉(碑峰)이다.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가 이 비석이 진흥왕 순수비임을 밝혀냄으로써 봉우리 명칭이 ‘비봉’이 되었다고 한다. 봉우리 오른편은 등반장비를 갖추어야 오를 수 있는 난코스이고, 조금 더 걸어가면 오르기 쉬운 곳이 나온다. 쉬운 곳이라고 해서 만만히 볼 코스는 아니지만, 바위 사이를 오르다보면 어느새 의연히 서 있는 비석 하나를 만나게 된다. 인생 샷이 나올 만한 포토 존으로서 수많은 등반객들이 이 비석을 벗 삼아 사진을 찍곤 한다. 정상에 서면 강남은 물론이고 인천까진 무리 없이 보인다. 이곳에 오면 탁 트인 경치가 무엇인지 완연히 느낄 수 있다. 이제는 미세먼지 없는 날을 골라야 하지만 말이다. 잠시 감상에 취해본다. 어머니 소서노를 잃고 새 터전을 찾아 이 산을 올랐을 비류와 온조도 이 산 어느 봉우리에 이와 같이 서지 않았을까. 진흥왕도 이 비석을 세우며 창대한 원정의 절정을 맛보지 않았을까. 자연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고, 사람만 부단히도 오가는 것 같다. 누군가는 이름을 남기며, 또 누군가는 흔적도 없이.
1) 북한산 순수비의 진품은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 있고, 비봉에는 실물과 같은 크기의 모형이 서있다.
하산하며
하산하는 가장 짧은 코스는 승가사(僧伽寺) 방향이다. 바위와 나무 틈새로 난 길을 따라 내달리고 보면 20여 분 만에 승가사 입구의 평지를 만나게 된다. 이곳에서 지친 걸음을 이끌고 다시 승가사로 향하라 하면 가혹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꼭 들려보길 바란다. 천축으로 향한 혜초스님과는 반대로 우리나라로 온 천축스님 승가대사의 상(像)을 만날 수 있는 유일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최근에 다시 지어진 전각들 뒤로 계단을 오르면 ‘약사전’ 석실에서 이 스님의 상을 마주할 수 있다. 보물 1000호인 이 승려상은 딱 보기에도 부드럽고 후덕하다. 불상이나 보살상과는 또 다른 포근함이다. 그리고 또 하나, 약사전에서 다시 계단을 오르면 보물 215호인 고려시대 마애불을 만나게 된다. 아니 굳이 계단을 오르지 않고 먼발치에서 보아도 그 위용이 느껴질 만한 대형 불상이다. 정교하고 세련되기보단 투박하고 복스럽다. 이 절에는 정조 때 청으로부터 받은 옥불(玉佛)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절도 문을 닫았던 판이었으니 불상인들 온전했을까.
하산 길은 이왕이면 계곡을 타고 내려와 간간히 발도 담그고, 세수도 하면서 산행의 피로를 씻길 바란다. 다시 7212번 버스를 타고 통인시장에서 하산주 한 잔을 걸치면 오늘 답사는 끝난다. 만약 여력이 있다면 ‘세종대왕 나신 곳’과 ‘한성정부 터’는 그 의미가 남다르므로 일부러라도 찾아보면 어떨까 싶다. 윤동주와 이상(李箱. 1910~1937, 본명 김해경)의 흔적을 찾아보는 것도 좋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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