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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3호 [버스타고 떠나는 답사 이야기] 서울의 기도처들을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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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조회 662회 작성일 19-03-11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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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기도처들을 찾아서

708번·701번 연계 코스

글쓴이 지지성

조선대 대학원에서 사학을 공부했으며, 20여 년간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틈틈이 전국 곳곳을 답사하고 있다.

새해를 맞이하며 기해년 새해가 밝았다. 이 글을 읽는 모든 이들의 복을 기원하며 서울의 기도처들을 찾아보고자 한다. 600년 도읍에 기도처야 넘치고도 남지만 이번엔 유불도 3교의 기도처를 모두 둘러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출발지는 언제나처럼 광화문광장이다. 600여 년 서울의 중심이자 도로원표가 있는 곳이니 이곳만큼 좋은 출발점도 없다.

제사길 1. 사직단과 국사당 선바위 광화문광장의 오른편 교보문고와 미 대사관 사이 KT광화문지사 정류소에서 708번 버스를 타고 첫 번째 제사 터로 향한다. 만약 답사일이 일요일이라면 정류소를 다시 확인해봐야 한다. 휴일에는 광화문광장 일대를 차 없는 거리로 운영하고 있으니, 변경되는 정류소를 확인하고 움직이는 것이 당황하지 않는 첫 걸음이다.
경복궁을 지나면 ‘사직단(社稷壇)’이 나온다. 진행방향의 오른편 창문으로 보물 177호 사직단 정문을 볼 수 있다.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을 보면 흔히 ‘종묘사직(宗廟社稷)’이라는 단어를 쓰는데 그때 등장하는 ‘사직’이다. 사극에서 흔히 듣는 ‘종사(宗社)’라는 말도 이 ‘종묘사직’을 줄인 것이다. ‘사직’이란 토지의 신 ‘사(社)’와 곡물의 신 ‘직(稷)’을 합해 일컫는 것으로 농사의 신을 뜻하는데 ‘종묘사직’이라 할 때는 대개 국가를 말한다. 도읍을 정할 때 ‘좌묘우사(左廟右社)’ 즉 왼쪽엔 종묘, 오른쪽엔 사직을 가장 먼저 세운 데서 유래한 것이다. 즉 사직단이란 농사와 관련된 신들에게 제사 지내기 위한 단(壇)이란 의미이다. 패전국의 종묘사직을 철저히 파괴하는 것은 그 혼을 끊어 놓기 위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유교사상이 유입된 삼국시대부터 사직에 대한 제사를 지낸 것으로 보인다. 지금의 사직단은 도성 건설과 함께 세워져 조선의 역사와 함께 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 철저히 파괴되어 공원과 학교의 일부로 잘려 나가 왜소한 곳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국가를 상징하는 유교적 제사 공간이 사직단이다.
버스를 조금 더 타고 ‘독립문역, 한성과학고’ 정류소에 내리면 오늘의 두 번째 제사 터를 찾아갈 수 있다. 버스에서 내린 뒤 오른쪽 골목길로 들어가서 10여 분가량을 올라가다 보면 ‘인왕산아이파크 아파트 108동’ 옆에 ‘인왕사(仁王寺)’가 보인다. 조선 초에 서봉, 서산이라 불리던 곳이 인왕산으로 불리게 된 것은 인왕사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 곳이 이 절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여기에서 계단을 조금만 더 올라가면 ‘국사당(國師堂)’을 만날 수 있다. 원래는 남산에 있었으나 일제가 남산에 신궁(神宮)을 건립하면서 이곳으로 옮겨졌다. 일반적으로 ‘당(堂)’이란 말은 ‘사임당(師任堂)’ ‘사명당(泗溟堂)’처럼 건물을 이르는 것이지만, 다른 의미로는 ‘무당집(巫堂-집)’을 일컫는다. 국사당은 조선의 왕사였던 무학대사(無學大師. 1327~1405)를 모시는 무당집이다. 승려를 모시는 무당집이라는 것이 의아하기는 하지만, 점보는 승려도 있는 마당이니 이른바 불교와 도교의 융합 현상이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곳 국사당은 음력 섣달을 제외하고는 전국의 무당들이 시시때때로 몰려와서 굿을 하기 때문에 운이 좋으면 ‘굿도 보고 떡도 먹는’ 재미를 누릴 수 있다.
또한 이 곳 인왕산 서쪽자락은 어떤 소원이든지 간절히 바라는 것 한 가지는 들어준다는 선바위(禪巖)가 서 있어 영험하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당초 한양성곽을 쌓을 때 무학대사가 이 선바위를 도성의 안으로 넣고자 하였으나, 정도전의 반대로 성 밖에 위치하게 되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국사당에서 계단을 조금 올라 이 바위 앞에서 한 해의 복을 빌어봄도 좋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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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길 2. 독립문 국사당을 둘러보고 나면 다시 독립문공원으로 내려오자. 독립문공원은 독립문과 서대문형무소가 공존하는 장소이다. 서대문형무소는 1908년 일본인에 의해 건설된 뒤 80여 년간 약 35만 명을 수용했던 폭압의 시설이다. 경성감옥·서대문감옥·서대문형무소·서울형무소 등의 수많은 이름으로 불렸다. 이곳에서 쓰러져간 독립 운동가들과 민주인사들의 이름은 다 나열할 수조차 없을 정도이다. 관람방향을 따라 돌아보다 보면 한두 시간은 훌쩍 지날 정도로 다양한 관람과 체험공간이 있다. 아이들과 함께 방문해도 좋은 곳이다.
독립문공원에서 독립문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독립문의 이름에 걸맞게 의연히 서 있다. 독립문(獨立門)은 역사교과서에도 나오는 것처럼 청일전쟁 직후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기념하기 위해 청의 사신을 맞았던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세운 것이다. 교과서에는 ‘모화관(慕華館)을 헐고 독립회관(獨立會館)을 세웠다’는 내용도 함께 나온다.
돌아보기 전에 일단 팩트 체크부터 하자. 첫째 독립협회가 독립문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독립문건립추진위원회’가 먼저 만들어져서 독립문을 만들기 위한 작업을 했고, 이 위원회가 변모해서 독립협회가 된 것이다. 두 번째 현재의 독립문은 원래 위치가 아니다. 지금보다 조금 더 왼쪽, 그러니까 현재 고가도로 쪽에 있었다가 박정희 정권 시절 고가도로를 만들면서 통째로 옮겨 놓은 것이다. 세 번째 독립문에 앞뒤로 새겨진 ‘독립문’과 ‘獨立門’이라는 글씨는 이완용의 것이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것 중 하나가 이완용이 독립협회의 초대회장이었다는 사실이다. 당시까지만 해도 이완용은 매국노이기보다는 혁신관료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심지어 3.1운동 때 이완용이 민족대표 33인 중 1인으로 참여할 뻔 했던 일화도 있다. 본인의 거절로 무산되었지만 말이다.
독립문의 태극기는 우리가 아는 문양이 아니다. 태극기가 현재의 형태로 정해진 것은 1949년의 일이고, 그 이전에는 다양한 형태의 태극기가 존재했다. 다른 모양의 태극이라고 틀린 것은 아니란 말이다. 영은문 기둥 앞에 당당히 서있는 독립문은 프랑스 개선문의 형태를 본받아서 서양 기술자들이 설계하고, 한국인 목수들이 시공한 개화의 산물이다. 화강암으로 만든 이 홍예문(虹霓門. 무지개모양의 문)은 전란의 화마에서도 살아남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시간이 있다면 독립회관 자리를 찾아가보자. 독립문에서 영천시장방향으로 건너면 ‘독립문어린이공원’ 화장실 옆 화단에 ‘독립회관 터’라는 표석이 있다. 하지만 지번을 찾아보면 표석이 있는 위치에서 금화터널 쪽으로 가다 보면 나오는 ‘독립문, 삼호아파트’ 정류소 뒤편이 실제 장소로 나온다. 아마도 이곳이 실제 장소였을 가능성이 높다. 서울에 설치된 여러 표석들 중에는 주민들의 민원이나 관람의 편의를 위해 실제 장소와 다르게 설치된 것들이 다수 있다. 독립회관은 독립협회 이후에 친일단체 일진회의 건물로도 이용되었던 곳이다. ‘독립협회는 어찌 자주는 이야기하지 않고 독립만을 이야기 하는가’라는 고종의 하소연처럼 독립협회 자체는 그리 자주적이지만은 않았을 뿐더러 친일적 인사들이 꽤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한 인연으로 독립협회가 해산된 뒤 일진회가 잠시 이 건물을 이용했었다.
이 건물 뒤 골목에는 영화 ‘아리랑’의 감독 겸 주연배우 나운규가 배고픈 서울 생활을 했던 옛 하숙집이 있었다. 지금은 그 흔적조차 기억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상황이라 표지판 하나 남아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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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길 3. 진관사와 샤머니즘박물관 독립회관 터까지 봤다면 영천시장골목에서의 가벼운 요기를 추천한다. 크게 화려하지 않지만 그래도 입맛을 돋우는 분식점들이 즐비하다. 식사를 한 후에는 ‘영천시장’ 정류소에서 701번 버스를 타고 진관사로 가보자. 이 버스의 노선은 임진왜란 때 선조의 피난길이다. 그날의 선조가 되어 당시의 빗길 속을 함께 가보는 것은 어떨까? 선조는 백성을 버린 왕일까, ‘종묘사직’을 지킨 영웅일까?
버스로 40여 분을 가다가 ‘하나고, 삼천사, 진관사입구’ 정류소에 내리면, ‘은평 한옥마을’을 만나게 된다. 2000년대 조성된 새로운 형태의 한옥촌이다. 새로이 만들어지다 보니 옛 한옥들이 모여 있는 북촌이나 남촌과는 또 다른 멋을 보인다. 명당을 찾아 조성된 곳답게 뒤편의 북한산 자락과 어울려 꽤나 멋드러진 정취를 자아내고 있다. 사진기를 들어 풍광을 찍게 하는 공간이다.
버스에서 내린 뒤 바로 우회전해서 한옥마을 사이를 지나 쭉 직진하면 바로 진관사(津寬寺)가 나온다. 진관사는 크지 않은 비구니 사찰이지만, 이곳으로 인해 진관동이라는 동의 이름이 만들어졌을 정도로 유서 깊은 곳이다. 자신을 보호해주었던 진관대사를 위해 고려 현종이 명당 중 명당을 골라 세운 곳으로 고려 국왕들이 직접 방문해서 참배하던 절이다. 그리고 조선 태조 이래로 영혼들을 위한 수륙재(水陸齋)를 지내던 곳이다. 수륙재는 다른 말로 무차대회(無遮大會)라고도 하는데, 개인적인 천도재와는 달리 국가적 성격의 행사였다.
유교 국가 조선에서 왕실은 끊임없이 불교식 수륙재를 지내려고 노력했고, 신하들은 끊임없이 반대했다. 연산군이 폭군이 된 것도 어찌 보면 왕위계승자로서 첫 번째 행사인 수륙재가 신하들의 저항에 부딪히면서 반감이 싹터서였을지 모른다. 이곳 진관사는 화재와 6.25전란에도 불구하고, 국가무형문화재인 ‘진관사 수륙재’를 유지하고 있다. 기회가 된다면 수륙재가 거행되는 일자를 맞춰서 찾아보는 것도 좋다. 영혼을 위로하는 진혼제(鎭魂祭)이면서 축제인 불교식 행사이니 함께 즐겨보자. 이곳 진관사에서는 대개 가을에 수륙재를 거행하는데 이즈음에 방문계획이 있다면 시간을 맞춰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이곳은 불교계 독립운동가이며, 사상가인 백초월(白初月. 1878~1944)이 기거했던 곳이다. 불교계 독립운동가 하면 만해 한용운을 꼽지만, 백초월은 한용운만큼이나 불교계를 대표할만한 인물이다. 민족대표 33인중 불교계를 대표했던 한용운·백용성 등이 체포된 이후 불교계 3.1운동을 실질적으로 주도하고, 불교계 독립 운동가들을 양성했던 인물이 백초월이다.
그래서 이곳에서 발견된 태극기를 백초월과 연결해서 생각하고 있다. 일본기의 붉은 무늬 위에 고의로 덧그린 이 태극기는 일본을 누르고 대한민국의 기상을 더욱 높이겠다는 의지의 표현인 것이다. 그런데 이 태극기도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태극기와는 형태가 다르다. 오히려 상해의 임시의정원에서 제정한 태극기의 모양과 매우 유사하다. 또한 이 태극기가 상해에서 발간된 신문들과 함께 발견된 것을 비추어봤을 때 상해 임시정부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일주문과 해탈문을 지나면 왼편에 소담한 한옥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사천왕문이나 금강문이라고 해서 사찰을 지키는 수호신을 모시는 공간이 매우 축소되어 있다는 것이 이채롭다. 일반적으로는 절에 들어서는 나쁜 기운을 막기 위해 각종 역사(力士)들이 절의 입구를 지키고 있다. 대개 사찰의 입구에 서 있는 사천왕상은 다소 위압적인 데 비해, 이곳 진관사의 금강역사들은 살짝 그림으로만 위치를 지키고 있다. 말도 안되는 생각이지만 사천왕이나 금강역사보다는 미소를 띤 관음이 절의 입구에서 방문객을 맞아주는 절이 있다면 어떨까 싶다.bbd5185c01c1b2e774a28c76f9ac3bce_1552271558.jpg진관사 대부분 건물들은 웅장함과는 거리가 좀 있다. 소담하다는 표현이 딱 어울린다. 아기자기하게 들어선 건물들 사이에서 명부전(冥府殿)을 만나면 건물에 그려진 지옥도(地獄圖)를 한번 살펴보자. 명부전은 다른 이름으로 지장전(地藏殿), 시왕전(十王殿), 쌍세전(雙世殿)이라 불리며, 저승계에 가 있는, 특히 지옥에 떨어져 있는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지어진 건물이다. 내세구복의 의미가 가장 강한 건물이 명부전인 것이다. 그런데 명부전 벽면에 지옥도를 그리는 경우는 흔치 않으므로 한 번쯤은 눈여겨보자. 대개는 건물 내부 지장보살(地藏菩薩) 뒤편의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속 일부로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림을 보면서 천만관객을 모았던 영화 <신과 함께> 속 지옥의 모습과 비교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어떠한 모습이건 사람들이 생각하는 죄에 대한 정당한 형벌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지만 말이다.
진관사를 봤으면 샤머니즘 박물관 ‘금성당’(錦城堂)으로 걸음을 옮겨보자. 일주문과 주차장을 지나 좌회전을 해서 북한산 둘레길을 따라 걸어가면 은평 뉴타운이 나온다. 북한산 둘레길의 아름다운 경치를 보며 걸으면 그다지 먼 길은 아니다. 단지 내에 있는 은평디지텍고등학교를 지나면 주변의 아파트 건물과는 이질적인 한옥 건물을 만날 수 있다. 금성대군(錦城大君. 1426~1457)을 모신 신당(神堂)인 금성당이다. 금성대군은 세종의 6번째 왕자로서 형제 중 세조의 왕위찬탈에 저항했던 유일한 왕자이다. 사육신 사건으로 순흥(順興)에 유배되었다가 관노의 밀고로 사형 당하였다. 그 억울한 죽음을 기린 민중을 통해 무속의 신이 되었고, 그를 모신 금성당은 한양 인근에서 영험하기로 유명했다.
무속신앙의 성쇠가 그러하듯이 금성당도 그 흐름을 벗어날 수 없었다. 금성당은 서울에만 3곳이나 있었고, 연신내만 해도 윗당, 아랫당으로 나뉘어 있었지만 도시 재개발 과정에서 모두 사라지고 이곳 아랫당만 남게 되었다. 그나마도 뉴타운이 건설되면서 파괴될 위기에 처해 있었으나 2008년 국가 민속문화재로 지정되면서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민속학자 양종승 박사의 기증을 받아 개관한 샤머니즘 박물관을 정릉에서 옮겨오면서 재탄생하게 되었다. 그가 기증한 2만여 점의 민속자료들을 소장·공개하고 있는 이곳은 한반도의 무속과 관련된 각종 유물은 물론 세계 각지의 샤머니즘 관련 물품을 챙겨볼 수 있는 국내에서 몇 안 되는 공간 중 하나이다. 각종 부적과 무속 관련 자료들이 건물의 곳곳에 소중히 보관·전시되어 있다. 대개는 목요일과 금요일만 개방을 하니, 이왕이면 시간을 맞춰 방문하는 것이 좋다. 개방일에 찾아간다면 마루에 놓인 영험한 돌을 들어 소원성취 여부를 확인해보자. 소원을 빌며 돌을 들었을 때 안 들리면 그 소원은 꼭 이루어진다고 한다. 그리고 이왕이면 10여 년을 굿판만 쫓아다녔다는 학예연구관의 리얼한 강의를 부탁해보자. 접신의 경지에까지 이르렀다하니 무속에 대한 새로운 경계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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