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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4호 [생활상식] 대한민국임시정부 100주년 임시정부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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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조회 1,478회 작성일 19-05-08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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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임시정부 100주년
임시정부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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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국내·외에 8개의 임시정부가 만들어졌다. 대부분 전단정부(실체 없이 전단지 혹은 문서상으로만 존재하는 정부)에 불과하지만 서울의 한성정부, 프랑스 조계지인 상하이의 임시정부, 러시아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는 조직적 실체가 있던 정부였다. 상하이 임시정부에는 29명의 독립투사들이 모여 4월 10일부터 하룻밤 새 국가 체제를 만들었다.
1919년 4월 11일, 상하이 임시정부가 탄생했다. 같은 해 9월, 망명정부를 유일하게 받아주는 프랑스의 조계지라는 안전함과 외교활동에 유리하다는 점을 이유로 서울의 한성정부,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가 상하이 임시정부에 통합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탄생한 것이다.
2019년 4월 11일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꼭 100번째 생일을 맞는 날이다. 잘 아는 것 같지만 또 잘 모르는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민주공화정,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이름에서 보이듯 ‘민국’이다. 인민이 주인인 나라다. 국호로 ‘고려공화국’, ‘조선공화국’, ‘신한민국’ 등이 제안됐으나 ‘대한민국’으로 결정되었다.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은 신석우의 제안이었다. “대한으로 망하였으니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다는 의미에서 ‘대한’이 옳다. 그러나 우리는 제국으로 돌아가기 보다는 공화국을 이룩하고자 하니 ‘민국’이 옳겠다”는 것이 제안의 이유였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 1항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는 내용이다. 공화정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귀족정치에서 기인한 정치체계로 우리나라에서는 국권수호운동을 전개하던 1900년대에 등장했다. 1907년 국권수호운동 조직 중 하나인 신민회가 독립된 국가의 체제를 공화정으로 할 것을 주장한 것이다. 신민회 등장 12년 후,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이전까지의 왕정을 버리고 여러 사람의 합의에 의해 주권이 행사되는 공화정을 채택했다.
임시정부가 공화정을 채택할 수 있었던 데에는 신민회의 주역들이 임시정부에 합류한 것을 꼽을 수 있다. 신민회의 발기인인 안창호, 주요 인물인 이동휘, 이동녕 등이 상하이 임시정부에 결합했다. 이들을 포함한 독립운동가 29인은 1919년 4월 10일,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정한 임시헌장의 제1조를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으로 정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총 3개의 권력기관을 가지고 있었다. 민주주의 국가 대부분이 채택하고 있는 삼권분립을 따른 것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입법은 임시의정원에서, 사법은 법원에서, 행정은 국무원에서 각각 담당했다.
입법기관인 임시의정원은 1919년 4월 10일 하오 10시(오후 10시)부터 4월 11일 상오 10시(오전 10시)까지 회의를 통해 국호, 관제, 국무원, 헌법 제정 등을 완성했다. 몇 달 동안 매달려도 완성하기도 힘든 것들을 하룻밤 만에 완성한 것이다. 이는 독립운동가들의 열의가 그만큼 높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이날 임시의정원은 국무총리를 중심으로 하는 내각책임제를 채택해 국무원을 구성했다. 국무총리에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재무총장 최재형, 교통총장 문창범, 군무총장 이동휘, 법무총장 이시영으로 국무원이 구성돼 행정을 담당했다.
국무원 구성을 보면 알 수 있듯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외교를 중시했다. 외교를 통해 지도에서 사라진 ‘대한’이라는 국가를 알려내고 독립을 쟁취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래서 미주지역에서 활동하고 우리나라 최초로 국제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은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임명한 것이다. 또한 신한청년당의 대표로 당시 파리강화회의 참석 차 프랑스에 체류 중이던 김규식을 외무총장에 임명해 외교 정책에 힘을 싣기도 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당시 독립운동 근거지의 대표 인물을 국무원으로 임명해 뿔뿔이 흩어진 독립운동 세력을 하나로 규합하는 역할을 했다. 재무총장 최재형과 교통총장 문창범은 러시아에서 독립운동을 펼쳤던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특히 최재형은 연해주에서 페치카(пе?чка, 러시아식 벽난로)라고 불리며 사랑을 받았다. 문창범 역시 대한국민의회 의장을 지냈을 정도로 연해주 지역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였다.
대한국민의회 대표자뿐 아니라 한성정부의 주요 인물들 역시 상하이 임시정부의 국무원을 구성했다. 이승만, 이동휘, 이시영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한성정부의 요직에 있었고, 한성정부는 13도 대표가 회의해서 정부 요인들을 선출했고 국민대회를 개최한 정당성이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안창호는 한성정부를 계승하여 크게 3개로 나뉘어 있던 임시정부를 상하이 임시정부로 통합하자는 의견을 냈다. 1919년 8월 30일, 대한국민의회는 해산을 결정하고 상하이 임시정부로 흡수된다.
1919년 9월 통합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차 개헌을 통해 다시 국무원을 재편하는데, 이 과정에서 내각책임제를 대통령중심제와 혼합한 형태를 띠게 된다. 1919년 9월의 조직은 널리 알려진 대로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하고, 국무총리 이동휘, 내무총장 이동녕, 외무총장 박용만, 재무총장 이시영, 노동국총판 안창호를 선임한다.

임시정부의 핵심, 성재 이시영 이시영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 법무총장과 통합된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재무총장을 역임한 핵심인물이다. 대한민국이 광복을 맞이했을 때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요인으로 김구와 함께 귀국했으나 이때는 개인자격으로 귀국했다. 이시영은 조선 말 이조판서를 지낸 이유승의 6형제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이들 6형제는 1910년 온 가족이 만주로 이주해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특히 이시영 형제는 ‘노블리스 오블리주’로 유명한데, 만석의 재산과 토지를 모두 팔아 독립운동 자금으로 모두 사용했다. 이시영을 제외한 5형제는 모두 광복 전 목숨을 잃었는데 아사를 한 형제가 있을 정도로 굶주림에 시달렸다.
이시영은 3·1운동 소식을 베이징에서 들었다. 형인 이회영과 함께 베이징 만세시위를 논의하던 끝에 독립운동가들이 모인 상하이로 이동해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다. 이렇게 이시영은 제1회 임시의정원 회의에 합류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세운 29인의 독립운동가에 이름을 올렸다.
제1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법무총장으로 선임된 이시영은 1919년 4월에 있었던 제2회, 3회 임시의정원 회의까지 참여했으나 5월, 격무로 인한 건강이상으로 법무총장을 사임했다. 하지만 1919년 9월 한성정부와 대한국민회의와의 통합으로 재편된 국무원의 재무총장을 맡게 됐다.
그러나 1921년 들어 이승만 대통령의 정부 운영방식에 불만이 생긴 독립운동가들이 임시정부를 떠나기 시작했다. 특히 1921년 5월 노동국총판을 맡았던 안창호가 노동국총판직을 사임하면서 이시영은 재무총장과 더불어 노동국총판까지 맡게 됐다. 이처럼 이시영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위기 때마다 임시정부의 중심 역할을 하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명맥을 이었다. 1923년 국민대표회의에서 임시정부를 둘러싼 갈등이 심화되자 독립신문에 ‘재무총장의 포고’라는 글을 통해 임시정부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를 호소했다. 특히 1935년 국민대표회의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해체가 결정되자 1924년 사임했던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에 다시 취임하며 법무부장 자리를 맡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해체를 막는 데 앞장섰다.
1937년 일본제국이 중국 본토를 침략하며 중일전쟁이 발발했다. 중일전쟁과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전시체제로 돌입해 정부의 규모를 늘렸다. 1940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주석제를 도입할 때 1919년 9월처럼 재무장을 맡았다. 1941년 개헌을 통해 재무장의 명칭이 재무부장으로 변경됐지만 이시영은 여전히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곳간을 책임졌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 선언으로 광복을 맞이하자, 11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김구 주석, 김규석 부주석 등과 함께 귀국했다. 귀국 후 만주에 세웠던 신흥무관학교 부활에 힘썼으나 실패하자 학교 설립으로 방향을 틀어 신흥초급대학(지금의 경희대학교)을 설립했다.
이시영은 1948년 UN에 의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지지했다. 현실적으로 한반도 문제에 대해 국제사회의 의견 통일이 어렵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해 7월 제헌국회에서 197표 중 132표를 획득한 이시영은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에 당선됐다. 그러나 이시영은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사퇴했다. 1951년 거창양민학살사건과 국민방위군 간부의 횡령 등의 문제가 불거졌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한 진상조사를 방해하는 권력층의 행태로 이시영은 부통령직을 사임했다.
이시영이 오랫동안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대한민국정부에서 주요한 직책을 맡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성품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이시영은 만석의 재산을 모두 독립운동 자금으로 기부하고 곤궁하게 살았지만 임시정부의 공금에 손댄 적이 없었다. 또한 임시정부가 위태롭던 시기에 누구보다 먼저 임시정부를 지키기 위한 노력에 박차를 가했기 때문이다.
이시영은 1953년 4월 한창 정전협상이 진행 중이던 시기 사망했다. 올해 4월은 이시영의 66주기다. 1949년 건국훈장을 받은 이시영은 보통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으로 기억된다. 대한민국임시정부 100주년을 맞이하는 올해,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며 27년 동안 임시정부를 지켜온 이시영의 발자취를 되새기며 나라의 소중함을 느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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