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자동차노동조합연맹

계간지

2019년 4호 [버스타고 떠나는 답사 이야기] 백범과 도마의 길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관리자 조회 782회 작성일 19-05-08 18:30

본문

백범과 도마의 길

704번 402번 연계노선과 400번 노선

대한민국 수립 100주년을 맞이하며 올해는 3.1만세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다. 더불어 도마 안중근 의사의 의거 110주년이면서, 백범 김구 주석의 서거 70기년이다. 작은 정성을 담아 백범과 도마를 기리는 기회를 삼고자 한다.
언제나 그러하듯이 출발은 광화문이다. 광화문은 도로원표가 있어서 뿐만 아니라, 전범기가 내려짐으로써 일제 강점의 종말이자 새날의 시작을 알린 곳이기 때문이다.

백범의 길 : 경교장 가는 길 경교장으로 가는 길은 버스로도 한두 코스의 짧은 거리이면서 볼거리들이 적지 않기에 걷기를 추천한다. 중간 중간에 있는 표석을 읽으며 걸으면 더욱 짧게 느껴질 것이다. 광화문 광장에서 동화 면세점 방향으로 우회전해서 쭉 걸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서울역사박물관 야외 광장이 나온다. 옛 경희궁(慶熙宮)의 권역이다. 국권 피탈의 시기 파란 없는 강토가 있었겠는가마는 경희궁만큼 처참히 뜯겨진 공간도 많지 않다. 전각이며 부속물들은 일제에 의해 해체되어 호텔과 학교의 부자재로 이용되었다. 그리고 공간은 일본인 학교로 이용되었다. 이 때문에 복원된 경희궁의 크기도 다른 궁궐들에 비해 작은 편이고, 인기도 덜한 편이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조용히 궁궐구경을 할 생각이 있다면 오히려 경희궁이 제격이다. 서울역사박물관과 시립미술관까지 묶어서 한적한 여행으로 추천하고 싶은 장소이다.
경희궁에서 나와 조금만 더 걸으면 돈의문마을박물관이 나온다. 옛 집들을 그대로 박물관으로 이용한다는 발상이 신선하다. 조선시대 반송방(盤松坊) 이야기에서부터 신문로, 과외방 골목의 흔적까지 서대문 지역의 ‘동네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이곳 또한 별미 같은 공간이다.

백범의 길 : 경교장 경희궁에서 조금만 걸으면 강북 삼성병원 입구에 병원건물로는 어울리지 않는 건물이 버티고 있는데, 이곳이 바로 경교장이다. 일제 강점기 광산업으로 돈을 번 최창학(崔昌學. 1891~1959)이라는 인물이 ‘죽첨정(竹添町)’이라는 이름으로 세워 이용했던 곳이다. 최창학은 해방 직후 생존을 위해 ‘임시정부 환국 환영 준비 위원회’를 찾는다. 죽첨정의 내부를 세세히 담은 사진을 준비 위원회에 보내면서 김구와 임시정부를 자신의 건물에 모시고 싶다는 뜻을 전한다. 이러한 노력이 성공하여 김구(金九. 1876~1949)의 거처 겸 환국한 임시정부의 청사로 사용되었다. 인근에 경교(京橋)라는 다리가 있다고 해서 경교장(京橋莊)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최창학의 이사진들은 이후 경교장을 복원할 때 큰 도움이 되었다.
이 부분에 대해 백범일지는 별로 말이 없다. 그저 ‘최창학 씨의 집에 머물게 되었다’고만 하고 있다. 또한 환국연설을 보면 ‘악질분자의 건국사업 참여 배제에는 찬성하나 이를 사전에 처리하고 갈 것인지, 통일 후에 처리할 것인지 결과적으로는 전후가 동일하다. 다만 아직 구체적 사정을 알 수 없으니, 추후 언급 하겠다’고 하는 모호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국내 세력이 없던 김구의 입장에서는 명확한 상황 파악이 힘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경교장에 들어가면 식당으로 썼던 지하박물관부터 관람하면 된다. 김구의 장례가 끝난 직후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한독당)의 기록이 모두 소각된 공간이기도 하다. 김구 사후의 불똥이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고민이었으리라.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김구의 혈의(血衣)이다. 넓게 밴 핏자국이 그날의 참화를 고스란히 느끼게 해준다. 전시관은 효창공원의 백범기념관만큼 웅장하지는 않더라도, 백범과 경교장의 역사를 담아내기 위해 흘린 노력들이 절절히 느껴진다.
2층에 오르면 백범이 마지막으로 머물던 응접실이 나온다. 그날 김구는 붓글씨를 쓰고 있었고, 포병 소위이면서 한독당 당원이었던 안두희(安斗熙. 1917~1996)는 전방 배치 전 인사를 하겠다는 핑계로 김구 앞에 섰다. 평소 안면이 있었던 안두희였기에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고, 안두희는 그 방심의 틈새를 뚫고 4발의 총탄을 쏘았다. 총성을 듣고 뛰어온 비서진들의 절규에도 백범은 끝내 숨을 거두었고, 안두희는 순순히 체포되어 헌병대에 인계된다. ‘백범이 남북협상 등 사회적 혼란을 주었기 때문에 범행을 저질렀다’는 안두희의 변명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의심한다. 배후에 이승만이 있는 것이 아닌가?
안두희는 실형을 살다가 6.25를 핑계로 군에 복귀하고, 고속 승진 후 소령으로 예편했다. 제대 후 1군 사령부 부식 납품을 통해 막대한 경제적 이익도 얻게 되었으니 ‘권력의 비호가 없었으면 가능했겠는가?’ 하는 의심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1996년 당시 부천 소신 여객 기사였던 박기서 씨에게 붙잡혀 안두희는 사망하게 된다. 다양한 의견들에도 불구하고 법원은 ‘주관적으로는 정당성을 가지나 법질서 전체 관점에서는 용인될 정당성을 가진다고 볼 수 없다’는 이유로 박기서 씨에게 3년을 선고했고, 다음 해 대사면을 통해 석방되었다. 박기서씨는 지금은 택시 운전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응접실 창가로 보이는 건물들 사이에 주목해야 할 곳이 하나 있다. 4.19혁명 기념 도서관이다. 이기붕(李起鵬. 1896∼1960)의 집터에 세워진 이 도서관은 1층 로비에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는 생생한 사진과 글들로 방문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경교장을 나와 서대문역 방면으로 조금만 걸으면 바로 만날 수 있으니 잠깐이라도 방문해보길 바란다.
acefc20db5ce41b2037d846a33e08f9a_1557307193_36.jpgacefc20db5ce41b2037d846a33e08f9a_1557307315.png

도마의 길 : 안중근 기념관 가는 길 4.19혁명 기념 도서관을 들렸다면, 그 방향으로 서대문역 사거리까지 와서 충정로 우체국 방면(서대문역 2번 출구 방면)으로 절반만 건너야 한다. 다 건너버리면 당황할 수 있다. 중앙차로제가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드리는 말씀이다. 중앙 승강장에서 서울역 방면으로 가는 704번 7021번 등의 버스를 타면 2정류장 만에 서울역 버스 환승센터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402번 버스로 환승을 해야 하는데 내린 곳이 아니라 바로 옆 제5 승강장으로 이동해서 승차해야 한다.
402번 버스를 타면 숭례문(崇禮門)을 지나 소월로를 거쳐 남산으로 오른다. 남산으로 오르자마자 남산도서관 정류소에서 내리면 된다. 남산도서관 쪽을 향해서 보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동상이다. 관직이 정3품 형조참의(刑曹參議)에 이르렀음에서 불구하고 영락없는 선비의 모습이다. 백성의 입장에서 시대를 바꾸고자 노력했던 정약용의 삶과 철학을 본다면 관모를 쓴 관료보다는 이러한 선비의 모습이 더욱 어울린다. 고개를 살짝 돌려 오른쪽을 보면 이황(李滉. 1501~1570)의 모습도 눈에 띤다. 1970년에 ‘애국선열 조상건립위원회’가 다산과 퇴계의 동상을 함께 건립하였다.
acefc20db5ce41b2037d846a33e08f9a_1557307440_56.jpgacefc20db5ce41b2037d846a33e08f9a_1557307515_56.png

도마의 길 : 안중근 기념관과 백범공원 정약용 동상을 끼고 계단을 오르면 유리 건물이 나오는데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다. 입구는 보이는 곳에 있지 않고, 오른쪽으로 약간 돌아가야 한다. 오른쪽으로 돌면 바로 보이는 동상이 있는데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후에 태극기를 꺼내들고 있는 모습의 안중근(安重根. 1879~1910)이다. 지금이라도 태극기를 펼쳐 ‘코레아 우라(Corea ura. ‘대한민국 만세’를 뜻하는 라틴어)’를 외칠 듯한 모습이다. 동상을 보고나서 오른 쪽으로 돌아보면 안중근 의사 광장이 나온다. 이 곳 광장을 가득 메운 유묵 비석들은 꼭 한 번 둘러보길 권한다. 사상가 안중근의 기상을 느낄 수 있는 한 문장 한 문장이 바위에 아로새겨져 있다. 여담이지만 어디에선가 안중근이 쓴 글씨를 보고 있다면 아주 높은 확률로 국가 지정 보물을 보고 있는 것이다.안중근의 많은 글들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안중근의 글들을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안중근 의사 기념관의 입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다소 긴 입구에도 사상가 안중근의 글귀들이 창연하게 적혀있다. 출입문을 들어서면 대한국인 안중근을 마주하게 된다. 조금은 굳은 얼굴의 하지만 흩어짐 없는 동상의 오른편, 전시관을 들어가면 우리 역사의 슬픔과 마주하기 시작한다. 국권 피탈의 과정과 무수한 독립의 노력들, 그 속에서 안중근이라는 인물이 살았던 투쟁의 삶들이 고스라니 설명되어 있다.
대형 박물관들이 다양한 시대와 주제를 망라한 백과사전식 전시라면 이런 기념관들은 오로지 한 인물, 한 주제에 초점을 맞추었기에 생동감을 더한다. 전시실이 3층까지 이어지지만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되어 있어 아이들과 함께 보기에도 불편함이 덜할 것이다.
전시장에서 나와 안중근 의사 광장의 왼편으로 내려서면 넓은 공원을 만나게 되는데, 평일에도 산책 나온 시민들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다. 이 공원을 지키고 있는 주인공은 백범 김구와 성재 이시영(李始榮. 1869~1953)이다. 이시영은 많은 이들에게 생소할 수 있는 이름이다. 우당 이회영(李會榮. 1867∼1932)의 동생으로 임시정부의 핵심요인이었으며, 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때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인물이다. 더불어 경희대학교의 전신인 성재학원(省齋學園)을 설립한 교육운동가이기도 하다. 이 성재학원은 신흥무관학교의 후신이기도 하다. 김구가 연설 하는 선동가의 모습이라면 이시영은 자상한 노옹의 모습으로 앉아있다. acefc20db5ce41b2037d846a33e08f9a_1557307627_66.jpgacefc20db5ce41b2037d846a33e08f9a_1557307674_57.jpg

식민의 흔적 : 식민지 역사박물관 공원 옆 한양 도성을 따라 내려오다 보면 버스를 타고 올라왔던 길을 다시 만난다. 힐튼호텔에서 좌회전해서 후암동 방면으로 내려가다가 후암제일교회 건너편에서 400번 버스를 타면 된다. 버스가 우회전을 하면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는 지역을 만나게 된다. ‘남영동 주민 센터 정류소’의 반대편 높은 담장의 구역. 용산 미군기지 이다. 조만간 미군기지가 이전한다고 하니 용산의 아픈 역사가 이제는 끝나기를 바라본다.
숙명여대 도서관 앞 정류소에서 내려서 우회전하면 식민지 역사박물관을 찾을 수 있다. 식민지 시대 침략과 저항의 역사가 각종 자료들 속에 녹아있다. 그리고 친일의 역사!! 청산되지 못한 과거의 흔적을 누군가는 철저히 지우고자 하지만 그럴수록 기억해야 한다. 그들이 누구이고, 어떤 짓들을 했는지. 그래서 더욱 더 이 공간이 중요하다.

백범과 도마의 길 : 효창공원 버스에서 내렸던 도로로 나와 숙명여대 쪽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오늘의 마지막 순례지 효창공원을 만나게 된다. 주변의 경관과 확연히 구분되는 녹지가 펼쳐져 있으니 찾기는 어렵지 않다.
이곳은 원래 정조가 유일하게 사랑했다고 고백한 여인과 그 아들의 묘소였다. 과거 드라마 ‘이산’에서 배우 한지민이 열연했던 ‘송연’이라는 인물이 의빈 성씨인데, 그녀와 문효세자가 이곳에 잠들어 있었다. 깨알 상식을 더하자면 국왕과 비의 묘소는 ‘릉(陵)’이라 높여 이르고, 왕세자급과 국왕의 모후의 묘소는 ‘원(園)’, 그 외는 평민과 같이 ‘묘(墓)’라고 한다.
일제 때 모자의 묘소를 서삼릉으로 옮기면서 이름만 남게 된 효창원이 다시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자리 잡게 된 것은 김구가 일본에 있던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의 유해와 상해에서 이동녕의 유해를 모셔 오면서부터이다. 왕실의 묘원에서 독립운동가들의 묘소가 된 것이다.
숙명여대 쪽에서 공원으로 들어가면 바로 보이는 곳이 임정요인 묘소이다. 중국에서 사망한 이동녕(李東寧. 1869~1940)의 유해와 해방 후 사망한 조성환(曺成煥. 1875~1948), 차리석(車利錫. 1881~1945)이 안장되어 있다. 많은 임정인사들이 국립현충원에 모셔져 있는데 반해 별도로 모셔진 이 분들이 외로워 보이면서도 친일혐의자들과 함께 묻힌 오욕을 겪지 않아도 되니 어쩌면 다행이다 싶다. 임정요인 묘역을 보고 광장으로 내려오면 삼의사 묘역에 이르게 된다. 이봉창(李奉昌. 1900~1932), 윤봉길(尹奉吉. 1908~1932), 백정기(白貞基. 1896∼1934) 세 명의 묘소여서 삼의사 묘역이라 부른다. 이봉창, 윤봉길과 달리 백정기라는 이름은 왠지 생소하다. 백정기는 김원봉의 의열단과는 계보를 달리하는 아나키스트로서 ‘흑색공포단’의 핵심 멤버였다.
일본 요인과 밀정들을 처단하던 중 밀고로 1933년 체포돼, 나가사키 형무소에서 생을 마감했다. 이 동네는 이봉창 의사가 젊은 시절을 보냈던 곳이다. 이봉창 의사는 고향에 묻힌 행운을 누린 셈이다.
그런데 삼의사 묘에 가면 봉분이 하나 더 있다. 안중근의 시신을 모시지 못한 가묘(假墓)이다. 하얼빈 공원에 묻었다가, 조국이 해방되면 조국 땅에 옮겨달라는 그 마지막 바람이 아직도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한중수교 후 뤼순 공동묘지에 대한 2차례의 발굴 시도에도 불구하고 성과가 없었다가 올해 다시 분위기기 무르익고 있지만 쉽지는 않아 보인다.
삼의사 묘역을 나와 사당인 의열사(義烈祠)를 지나면 백범 김구의 묘역에 이르게 된다. 계단을 약간 오르면 봉분 하나가 깔끔하게 단장되어서 참배객들을 맞이한다. 위압감이 느껴지지 않지만 그렇다고 초라하지도 않은 딱 그 정도의 단정한 봉분이다.
김구를 모신 효창공원은 국립묘지 아니라 지자체가 담당하고 있는 시립공원이다. 독립운동가를 모신 공간으로서의 격이 너무 떨어지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과 함께 청소년 탈선의 장소가 되는 등 관리의 문제가 제기되면서 국립묘지로 승격하자는 주장이 나왔었다. 그러나 국립묘지로 승격되면 시민들이 자유롭게 참배하고 이용할 수 있는 시간을 제한한다는 지적이 나오면서 아직 시립공원으로서 자리하고 있다. acefc20db5ce41b2037d846a33e08f9a_1557307737_86.jpgacefc20db5ce41b2037d846a33e08f9a_1557307789_25.png